
요하네스 예니케(1748-1827)
는 베를린 보헤미아 베들레헴 교회의 목사이며 귀츨라프가 수학한 베를린 선교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장이다.
그는 근대 독일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며 베를린선교회를 창립한 인물이기도하다.
제공된 사진은 설교자이자 신학자인 요하네스 예니케의 자필 서명된 편지 다섯 통의 일부이다.
모두 1807년에 작성되었으며 (베를린, 1807년 3월 9일부터 1817년 11월 17일까지), 도르눔의 고트프리드 안톤 폰 할렘에게 보내졌다 (1757년 1월 5일 도르눔에서 출생, 1812년 4월 5일 도르눔에서 사망). 그는 1782년부터 1806년까지 도르눔의 관리였으며, 마지막으로 아우리히의 대리 변호사였고, 그의 아내 안나 도로테아, 본명 케틀러 (1772년 7월 19일 에센스에서 출생, 1835년 10월 16일 아우리히에서 사망)에게 보내졌다.
그의 아들 게르하르트 폰 할렘 (1791-1830)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나중에 아우리히의 고문이 되었으며, 예니케에 의해 확인되었다. (1807년 6월 15일 편지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게르하르트 폰 할렘은 1805년부터 1807년까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빌헬름 김나지움에서 수학했으며, 1807년 가을에 괴팅겐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편지의 주제는 주로 게르하르트의 안부이며, 왕실에 대한 언급도 있다.
게르하르트 폰 할렘에 대한 내용
: 게르하르트 카를 하인리히 폰 할렘, 1791년 5월 22일 도르눔에서 출생, 1830년 10월 27일 아우리히에서 자녀 없이 사망, 레어의 사법 위원, 이후 아우리히의 고문이었다.
그는 고트프리드 안톤 폰 할렘 (1757년 1월 5일 도르눔에서 출생, 1812년 4월 5일 도르눔에서 사망, 방문 중이었음)의 장남이었으며, 1782년부터 1806년까지 도르눔의 관리였고, 마지막으로 아우리히의 대리 변호사였으며, 안나 도로테아, 본명 케틀러 (1772년 7월 19일 에센스에서 출생, 1835년 10월 16일 아우리히에서 사망)의 아들이었다.
1824년 5월 14일, 그는 라우데에서 헬레네 마리 루이제 아델하이드 폰 슈피스 (1803년 1월 13일 출생, 1832년 10월 17일 하젤뤼네 근처 로텐에서 사망)와 결혼했다. 그녀는 로텐의 지주 크리스티안 볼프강 폰 슈피스 (1774년 출생, 1854년 9월 28일 사망, 하젤뤼네에 묻힘)의 딸로, 1805년부터 1810년까지 아우리히의 시장이었으며, 코르넬리아 엘리자베스, 본명 보덴의 딸이다.
할렘 가문의 일부 유산 (게르하르트 폰 할렘의 몇몇 문서 포함)은 유티너 주립 도서관에 있다.
(소장: O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