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귀츨라프 학회

Dr. Sylvia Bräsel 교수의 Frauen reisen in die Fremde. Teil B의 번역과 원문

(역자 )

한글번역과 독일어 원문은 한독관계사 연구에 대가인 실비아 브레젤 박사(Sylvia Bräsel) 동아시아와 독일관계 연구단체인 Studienwerk Deutsches Leben in Ostasien e.V. 학술지인 StuDeO 기고하여  2026 6월에 게제된 연구논문이다.

실비아 브레젤 박사의 연구 작업 이전에는, 과학자로서의 베르타 곳체의 업적이나 1918/1919년에 발표된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보 제24호(석굴암)’에 관한 베르타 곳체의 전문 논문에 대해 학술적으로 독립된 논문(전기적·분석적 연구 모두)이 입증 가능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논문에서 브레젤 박사가 세계 최초로 획기적인 학술적 발견을 이루어 냈음으로 다음과 같은 연구 성과의 정당한 저작권자임을 확인한다.

1. 베르타 곳체 여사의 1913 방한 사실 최초 규명: 브레젤 박사는 지질학자 카를 곳체(Carl Gottsche) 교수의 아내인 베르타 곳체(Bertha Gottsche) 여사가 미망인이 후인 1913, 홀로 다시 한국을 여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2. 문화재 석굴암 연구의 개척적 성과: 베르타 여사가 독일의 동아시아 학술지(Ostasiatische Zeitschrift)(7, 1918–1919) 대한민국의 문화재인 석굴암 석굴에 관한 획기적인 글과 사진 자료를 게재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밝혀낸 것은 전적으로 브레젤 박사의 학술적 공로이다

이를 적극 지지하기 위해 귀츨라프 학회는 브레젤 박사의 해당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귀츨라프 학회 웹사이트(자료실) 게시함으로써, 국내 학계에도 적극적으로 알릴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적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연구의 정당한 저작권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고 정당하게 증명해 것이다. 이를 위해 한글번역과 독일어 원문을 제공하고자 한다.

(Anmerkung des Übersetzers)

Sowohl diese koreanische Übersetzung als auch der deutsche Originaltext basieren auf dem Forschungsartikel von Frau Dr. Sylvia Bräsel – einer führenden Expertin auf dem Gebiet der deutsch-koreanischen Beziehungsgeschichte –, der in StuDeO, der Zeitschrift des Studienwerks Deutsches Leben in Ostasien e.V., eingereicht und im Juni 2026 veröffentlicht wurde.

Vor der Forschungsarbeit von Dr. Sylvia Bräsel
gab es nachweislich keinen eigenständigen wissenschaftlichen Artikel ( weder biografisch noch analytisch) zu Bertha Gottsches Leistung als Wissenschaftlerin bzw. zu Bertha Gottsches 1918/1919 veröffentlichtem Fachaufsatz zum heutigen “Koreanischen Nationalschatz Nr. 24”.

Da Frau Dr. Bräsel in dieser Arbeit bahnbrechende wissenschaftliche Entdeckungen als Erste weltweit erbracht hat, bestätigen wir, dass sie die rechtmäßige Urheberin der folgenden Forschungsergebnisse ist:

Erstmalige Nachweisung der Korea-Reise von Bertha Gottsche im Jahr 1913: Frau Dr. Bräsel hat als Erste auf der Welt die historische Tatsache aufgedeckt, dass Bertha Gottsche, die Ehefrau des Geologen Prof. Carl Gottsche, 1913 als Witwe nochmals allein nach Korea reiste.

Pionierleistung in der Erforschung des Kulturguts Seokguram: Es ist das Verdienst von Frau Dr. Bräsel, die historische Wahrheit freigelegt zu haben, dass Bertha Gottsche in der Ostasiatischen Zeitschrift (Jg. 7, 1918–1919) einen wegweisenden Artikel nebst Bildmaterial über die Seokguram-Grotte – ein kostbares Kulturgut Koreas – veröffentlicht hatte.

Um dies nachdrücklich zu unterstützen, übersetzt die Karl-Gützlaff-Gesellschaft den besagten Artikel von Frau Dr. Bräsel ins Koreanische und veröffentlicht ihn im Datenarchiv auf unserer Website, um ihn der koreanischen Fachwelt bekannt zu machen. Damit werden wir klar und unanfechtbar unter Beweis stellen, wo die historische Wahrheit liegt und wer die rechtmäßige Urheberin dieser Forschung ist. Zu diesem Zweck stellen wir hier sowohl die koreanische Übersetzung als auch den deutschen Originaltext zur Verfügung.

  1. 한글 번역

이방으로 여행하는 여성들. B부분: 동행(여행)하는 여성들

이레네 마이어(1868-1952) 베르타 고체(1857-1939), 시대의 교양 있는 시민 계급의 여성, 동아시아를 여행하다.

(Frauen reisen in die Fremde. Teil B: (Mit)Reisende Frauen

Irene Mayr (1868-1952) und Bertha Gottsche (1857-1939), zwei gebildete bürgerliche Frauen ihrer Zeit, unterwegs in Ostasien)

실비아 브레젤(Sylvia Bräsel)

공통점, 평행선 그리고 차이점

이레네 마이어의 여행 일기¹ 읽으면서, 같은 시기에 지역을 여행했던 유럽 출신의 다른 (동행) 여성들의 알려진 기록들과 포괄적인 공통점 일정한 차이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텍스트들을 부분적으로 함께 조명해 봄으로써 이레네 마이어의 여행 기록을 자리매김하고 성과를 평가할 있게 된다.

따라서 마이어 부부가 홋카이도휴가 여행 준비하면서, 후일 비숍과 결혼한 이사벨라 버드(1831-1004) 여행 기록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해 있다. 독립심이 강했던 이사벨라 버드는 이미 1878 47세의 나이로 서양 여성 가장 먼저 홋카이도로 여행하여 아이누족 마을 등을 방문했다. 늦게 결혼한 영국인 세계 여행가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허입되기도 했다. 이사벨라 버드는 1880 일본의 미지의 (Unbeaten Tracks in Japan 1880)(2008 Forgotten Books 출판사에서 eBook으로 재발행) 같은 저서의 수익금으로 생계 여행 비용의 일부를 충당했다. 이는 저술가인 이사벨라 버드와, 20 초반이었던 독일 교수들의 동행 아내 이레네 마이어나와 베르타 고체를 첫눈에 구별 짓는 점이다. 결혼 성이 페터스였던 베르타 에밀리 고체는 심지어 약혼자를 찾아 혼자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1882 요코하마에서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이레네 마이어와 베르타 고체는 각자의 방식으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다문화적 경험을 갖추었으며, 나아가 비일상적인 요구와 조건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던 교양 있는 시민 계급의 새로운 여성 세대를 대변한다.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던 이레네 마이어는 문장만으로도 상황을 적절하게 스케치해 낸다. 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텍스트의 뛰어난 가독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레네 마이어의 건강한 체력과 유머 감각 역시 다른 강점으로 있다.

결국 홋카이도로 떠난 휴가 여행 마이어 부부에게 계획된 공동의 행동을 요구했다. 당연히 이레네는 우선적으로 남편의 학술 연구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탐사의 성공에 관심이 많았고 미지의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그녀는 도보와 승마, 수로와 육로 낯선 조건에 신속하게 적응할 있었다. 이는 숙련된 역할 분담 이상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또한 기록은 이들이 결코 철없는 모험가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쉽지 않았던 현지 상황에 대한 견고한 준비가 결국 휴가 여행 공동의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레네 마이어는 여행의 육체적 도전과 고초를 솔직하게 기술한다. 그러나 불평은 없었다. 언제나 교양 있는 여성으로서 그녀는 과거 이사벨라 버드나 베르타 고체가 그랬듯 자연의 커다란 역경과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했다. 여행 기록에 따르면 이레네 마이어는 예측할 없는 상황(, 모기 기타 자연의 위협) 신속하게 적응할 알았다. 동시에 이레네 마이어는 젊은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녀의수은주(역자주: 활발한 아이)” 어린 아들 클레멘스는 심지어 유모와 하녀를 대동하여 신분에 맞게 여행의 단계를 부모와 함께했다. 이러한 특권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기록은 전반적으로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부부 간의 매우 현대적이고 좋은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점은 이레네 마이어를 일본에서 가르쳤던 다른 독일인 학자의 아내, 베르타 에밀리 고체(1857-1939) 연결해 준다. 그녀 역시 젊은 여성으로서 남편 카를 크리스티안 고체 교수(1855-1909) 따라 동아시아로 왔다. 베르타 고체는 이레네 마이어처럼 일기에 여행 감상을 기록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저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대다수의 서구 남성 학자들보다 앞서 권위 있는 독일어 학술지에 한국의 중요한 불교 사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모든 점이 쓰는 여성 소개하고자 하는 저자의 관심을 한층 높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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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화된 마이어 부부의 가문 역사와는 달리, 베르타 고체의 생몰기록이나, 함부르크 대학 교수였던 카를 고체의 공식 사진조차 관련 매체에서 찾아볼 없었다. 출판물에 게재된 카를 고체의 사진은 함부르크 대학교 도서관 소장품으로, 해당 기관의 호의적인 허락을 얻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간에 수록되었다.⁴

고체 부부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질학자 고체의 유일한 누이인 빌헬미네 고체 또한 미혼이었음이 글을 위해 확인된 1909 10 11 카를 고체의 부고 기사를 통해 증명되므로,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족에게 남겨진 유품이나 자료(Nachlass) 존재하지 않는다. 베르타 고체에 관한 소수의 문서 등은 여러 도서관과 아카이브에 흩어져 있다. 따라서 비교 논문을 작성하고 베르타 고체라는 인물의윤곽을 다시 잡기 위해“, 저자는 여러 아카이브를 조사해야 했다. 소유자표시(Exlibris) 하나와 약간의 서면 기록만 남았을 사진은 장도 없이 특별한 여성의 삶은 베일에 싸여 있다. 조사 과정에서 교수 부인들 특징을 이루는 다른 흥미로운 공통점과 차이점들이 드러났다.

지질학자인 고체는 이미 1881 일본 정부의 위촉을 받아 1882년부터 1883년까지 도쿄 대학교(Daigaku)에서 지질학, 광물학, 수권생물학(고생물학) 가르쳤다. 그는 수사학적 재능이 뛰어난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강의 내용을 생생하게 기술할 있었으며, 강연을 하는 것도 좋아했다. 또한 고체는 대학 내에 광물학·지질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의 아내 역시 이레네 마이어처럼 남편의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고체 부부는 1883 함께 후지산을 등반했다. 그들은 한국으로 여정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고체 교수는 1884 5월부터 12월까지, 당시에는 아직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던 미지의 땅이었던 한국에서 역사상 최초로 현대적인 서구식 지질 조사를 수행했다. 그리하여 1886년에 발표된 한국의 지질학적 개요(Geologische Skizze von Korea)(1886)라는 제목의 최초의 현대적 논문은 독일 지질학자 카를 크리스티안 고체의 끝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고체 부부와 마이어 부부의 여행 조건은 똑같이 도전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전혀 개방되지 않았던 한국을 통과하는 고체 부부의 여행 경로가 담긴 지도 서한이 남아 있으며, 이는 동료 간의 호의로서 에카르트 데게(E. Dege) 교수님이 제게 제공해 주셨다. 지도에는 상주 근처의 낙동 마을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지질학적으로 흥미로운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체 부부가 상주 근처 낙동 마을에 있는 명망 있는 명가 풍산 유씨 가문의 저택낙동 마을의 수암종택 머물렀다는 타당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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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탐사 여행 중에 기력을 회복하고 안정적으로 숙박할 있는 장소를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달해 주신 유명한 한국 지리학자 에카르트 데게(E. Dege) 교수와 (낙동의 양반 가문 출신인) 한국의 지리학자 유우익 교수님과의 협의를 거치게 된것에 감사를 드린다.

고체가 탐사 여행을 떠나게 계기는 당시 한국을 통과하던 조선 왕조(1392-1910)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던 사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동아시아 전문가이자 외교관인 파울 게오르크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7-1901)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는 경제 발전을 위한 광산 탐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쿄에 있던 고체 교수를 초청하여 한반도에 대한 지질 조사를 수행하도록 했다. 과정에서 고체 부부는 짧은 시간 동안한국의 땅와 사람들(Land und Leute in Korea)”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카를 고체는 1886 지리학회지(Gesellschaft für Erdkunde)(5, 1-21) 동일한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이어 부부와 마찬가지로 카를 고체 부부 역시 생전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으며 (국제적으로) 두터운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자 도시 함부르크에서 교육과 학문의 후원자로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저명한 함부르크 상원의원이자 법학자, 시장이었던 베르너 멜레(Werner von Melle, 1853-1937) 유품 속에서 1933 10 20 베르타 고체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1896/97 뮌헨에서 공부했던 덴마크의 지질학 교수 픽토르 마드센(Victor Madsen, 1865-1947) 역시 고체 부부와 교류했다. 저자가 인터넷 조사를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카를 고체의 학창 시절부터 이미 덴마크 노르웨이의 동료 학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를 고체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미망인은 다양한 교류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오번 데일리 저널(Auburn Daily Journal) 1916 기사에 따르면, 고체 부인이 사크라멘토에서 열린 명망 있는 독일계 미국인 커플의신부 파티(Brautparty)” 참석했다고 전한다. 이로써 여성의 여행을 위치시키는 기여하는 하나의 고리가 연결된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성품이나 부부의 고된 여행 조건만이 유사점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삶의 궤적은 하인리히 마이어와 카를 고체의 안타까운 조기 사망이라는 비극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이레네 마이어와 베르타 고체 모두 자신의 연구를 위해 없이 헌신했던 남편들을 일찍 여의었다. 카를 고체는 1909 53세의 나이에 헬골란트섬 탐사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854년에 태어난 하인리히 마이어는 1911 강의 도중 뇌졸중을 일으켜 여파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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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타 고체 여성이 오늘날 한국의 국보 24호를 유럽에 알리다.

베르타 고체는 시대에 비추어 비범하게 독립적이고 주관이 뚜렷하며 교육받은  시민 계급 여성이었음에 틀림없다. 글의 저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베르타 고체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남성의 보호 동행 없이 1913 가을 미망인의 신분으로 다시 한번 동아시아를 여행했으며, 1 세계 대전 이후에는 한국으로의 번째 학술 여행까지 추진했다. 이는 프로이센 문화유산 비밀 아카이브(Geheimes Staatsarchiv Preußischer Kulturbesitz) 보관된 1920 8 12 차관 문서 서한 초안을 통해 증명된다

이는 시대의지적·지성적으로 압박받던 여성성이라는 단순화된 관념 역시 일정한 차별화와 다각적 시각이 필요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여행의 전제 조건은 어떠한 경우든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적절한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다. 예를 들어 베르타 고체는 자신의 논문에서하인과 한국인 통역사 동반하여 여행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통역사는서울에 있는 볼얀(Bolljahn) 선생님¹¹ 학교에서 완벽한 독일어를 배웠다“(위의 , 167) 기록했다.

1 세계 대전으로 인해 지연된 끝에 1918/19 권위 있는 학술지 동아시아 저널(Ostasiatische Zeitschrift)¹² 베르타 고체의 학술 논문 석굴암 석굴 사원(Steinhöhlen-Kloster Sok-Kul-Am)(오늘날 석굴암 / Seokguram-Grotte으로 표기) 게재되었다. 사진과 도면(그림 4) 첨부된 베르타 고체의 고찰은 한국 최초의 통일 왕국인 신라 시대(기원전 57 ~ 서기 935) 불교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문서화하고 있다. 이는 742~780 신라 ·중기에 건립된 불교 유적에 대한 서구 전문가들의 관심을 크게 도모했다. 여기서 덧붙이자면, 성리학적 규범이 지배했던 조선 왕조(1392-1910) 말기에는 이러한 문화유산들이 잊혀진 상태였다. 해당 학술지의 공동 편집자인 윌리엄 (William Cohn, 1880-1961) 교수가 아무런 편견 없이 그의 이어지는 한국 미술에 대하여(Zur koreanischen Kunst)(위의 , 168-200)에서 베르타 고체 여사의 연구를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교수는 심지어 1922 동아시아 저널』에 주제에 관한 추가 고찰¹³ 덧붙였으며, 이는 베르타 고체를 마침내 공인된 남성 학자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다.

베르타 고체는 56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부유한 시민 계급 여성들의 일반적인 복장을 채로 토함산(해발 750미터, 한국의 동해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석굴암까지 이어지는, 식물이 무성하게 우거진 3~4킬로미터의 자갈길(그림 3 참조, B. 고체 촬영 사진) 오르내렸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잊혀져 있던 석굴암은 1909년에야 길을 잃은 우체부에 의해 우연히 재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 당국은 이후 수년간 건축물을 보수·보존하려 했으나 미술적/건축적 이해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원형 (Rotunde) 콘크리트로 수리하여 화강암 블록으로 만들어진 인공 굴과 불상들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했다. 1961년부터 1966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근대화 독재자박정희(1917-1979) 대통령 하에서 전문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미 1962년에 사찰 유적은 국보 24호로 지정되었다.

내가 1995 처음으로 석굴암 굴사원과 아래로 2킬로미터 떨어진 불국사를 방문했을 , 유네스코는 전체 유적군을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한 상태였다. 이러한 발전에는 그녀의 출판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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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여를 했다.

재발견 직후 한국 내에서 일어난 반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1923 6 2 동아일보』에 게재된 세계의 경이」라는 제목의 기사 발췌문이 보여준다. “석굴암의 불상들은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예술품 하나에 속한다. … 이들은 전적으로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독특한 아름다움은 참으로 우리 조선 민족의 자랑거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절은 일제강점기 당시 예술품이 한국인들에게 정체성을 형성해 주었던 영향력을 보여준다.

중앙의 본존불상(그림 6) 좌대를 제외한 높이가 3.5미터에 달하며, 고대 한국에서 가장 단독 불상 하나이다. 또한 흥미로운 사실은 불상이 전설적인 문무왕(626-681) 수중릉 방향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문무왕은 통일신라의 번째 군주였다. 그는 한국의 동해에 묻혔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죽어서도 일본의 끊임없는 침략 시도를 상징적으로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과거와 최근 역사 사이의 고리가 연결된다.

남겨진 것들

이레네 마이어와 베르타 고체는 교육과 지식, 열정을 바탕으로 스스로 주체적으로 활동하며 남편들을 동반자로서 지원했던 시대의 여러 시민 계급의 여성들을 대변한다. 베르타 고체는 재정적 독립성을 바탕으로 미망인으로서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여행을 통해) 영위하고 자신의 학술적 관심을 추구하는 것마저 가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철학에서 인간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사상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역사적, 사회적, 지적 사상사적 맥락을 포함하며, 관점에서는 여성들의 자필 기록이나 다양한 의사표명을 연구하고 조명할 이러한 다각적인 시각이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러한 여행기, 편지, 논문 등을 식민지적 야욕의 망상이나 단순한 이국적 향수로 치부해 버리지 않고, 비로소 진정성 있는 위치 매김과 복합적인 평가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레네 마이어의 광범위한 여행기는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1890년경 홋카이도 섬과 아이누족의 삶에 관한 초기 시대적 기록이다. 한국의 불교 문화재에 대한 베르타 고체의 헌신과 그녀의 논문 발표는 오늘날 한국의국보 24 국제적으로 알리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레네 마이어와 베르타 고체의 기록은 깊은 존경을 불러일으키며, 주어진 사회적·제도적 규범의 안에서 자신들의 지평을 효과적으로 넓혀간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대 가장 뛰어난 여성 명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 퀴리(1867-1934) 말로 끝을 맺고자 한다. “나는 진보의 길이 결코 짧지도, 험난하지 않지도 않다는 것을 배웠다.”

  1. 독일어 원문

Frauen reisen in die Fremde. Teil B: (Mit)Reisende Frauen

Irene Mayr (1868-1952) und Bertha Gottsche (1857-1939),

zwei gebildete bürgerliche Frauen ihrer Zeit, unterwegs in Ostasien

Sylvia Bräsel

Gemeinsamkeiten, Parallelen und Unterschiede

Beim Lesen des Reisetagebuches von Irene Mayr¹ ergaben sich übergreifende Gemeinsamkeiten wie auch gewisse Unterschiede zu mir bekannten Zeugnissen von anderen (mit)reisenden Frauen aus Europa, die ebenfalls in dieser Zeitspanne in der Region unterwegs waren. Der punktuelle Einbezug dieser Texte ermöglicht es, die Reisebeschreibung von Irene Mayr besser einzuordnen und deren Leistung zu würdigen.

So ist es vorstellbar, dass das Ehepaar Mayr in Vorbereitung der „Ferienfahrten“ nach Hokkaido die Reiseaufzeichnungen von Isabella Bird – später verheiratete Bishop (1831-1904) – zur Kenntnis nahm. Die ihre Unabhängigkeit liebende Isabella Bird war bereits im Jahre 1878 im Alter von 47 Jahren als eine der ersten Westlerinnen nach Hokkaido gereist und hatte u.a. einige Ainu-Dörfer besucht. Die britische Weltreisende, die erst spät eine Ehe einging, wurde übrigens als erste Frau in die Royal Geographical Society aufgenommen. Mit dem Erlös ihrer Bücher wie „Unbeaten Tracks in Japan 1880“ (2008 im Verlag Forgotten Books als eBook neu herausgegeben) finanzierte Isabella Bird zum Teil ihren Lebensunterhalt bzw. ihre Reisen. Das unterscheidet die Autorin Isabella Bird auf den ersten Blick von Irene Mayr oder Bertha Gottsche – zwei „mitreisenden Ehefrauen“ deutscher Professoren von gerade mal Anfang Zwanzig. So reiste Bertha Emilie Gottsche, geborene Peters sogar allein zu ihrem Bräutigam nach Japan. In Yokohama heiratete das Paar im Jahre 1882.²

Irene Mayr und Bertha Gottsche repräsentieren auf ihre Weise eine neue gebildete bürgerliche Frauen-Generation, die fließend Fremdsprachen beherrschte, interkulturelle Erfahrungen vorweisen konnten – und zudem bereit war, sich ungewöhnlichen Anforderungen zu stellen.

Die sprachlich talentierte Irene Mayr vermag zudem mit wenigen Sätzen Situationen treffend zu skizzieren. Das wiederum trägt wesentlich zur guten Lesbarkeit des vorliegenden Textes nach heute bei. Irene Mayrs stabile Gesundheit und ihr Humor können als weitere Stärken angesehen werden.

Letztlich forderte diese „Ferienreise“ nach Hokkaido von dem Ehepaar Mayr ein durchdachtes gemeinsames Handeln ab. Natürlich unterstützte Irene in erster Linie die wissenschaftlichen Forschungen ihres Ehemannes. Aber sie erscheint auch selbst am Erfolg der Exkursion interessiert und neugierig auf das Unbekannte. Schnell vermag sie sich auf ungewohnte Bedingungen zu Fuß und zu Pferd, zu Wasser und zu Land, einzustellen. Das erforderte mehr als ein eingespieltes Rollenverhalten. Die Aufzeichnungen machen zudem deutlich, dass hier keine Abenteurer unterwegs sind. Eine solide Vorbereitung auf die nicht einfachen örtlichen Gegebenheiten machte diese „Ferienfahrt“ letztlich zu einem gemeinsamen Erfolg. Ehrlich beschreibt Irene Mayr dabei die körperlichen Herausforderungen und Strapazen der Reise. Aber es sind keine Klagen. Stets Dame nimmt sie die größten Widrigkeiten der Natur und fehlende Bequemlichkeiten wie einst Isabella Bird und Bertha Gottsche in Kauf. Aus dem Reisebericht geht hervor, dass Irene Mayr sich schnell an unvorhersehbare Situationen (Bären, Mückenplagen und anderen Naturgewalten) anzupassen wusste. Zugleich ist Irene Mayr eine junge Mutter. Ihr „Quecksilber“, der kleine Sohn Klemens, begleitet die Eltern sogar auf der ersten Etappe der Reise – standesgemäß mit Kinderfrau und Magd. Diese Privilegien waren andererseits die Voraussetzungen für eine solche Lebensführung. Der Bericht legt insgesamt eine recht moderne und gute Beziehung der Ehepartner im Kontext der Zeitverhältnisse nahe.

Das verbindet Irene Mayr mit der Frau eines weiteren deutschen Wissenschaftlers, der in Japan lehrte: Bertha Emilie Gottsche (1857-1939). Sie folgte ebenfalls ihren Ehemann Prof. Dr. Carl Christian Gottsche (1855-1909) als junge Frau nach Ostasien. Bertha Gottsche notierte zwar wohl nicht wie Irene Mayr ihre Reiseeindrücke in einem Tagebuch, aber sie veröffentlichte – wie die Verfasserin ermitteln konnte – vor den meisten westlichen männlichen Wissenschaftlern einen Artikel in einer renommierten deutschsprachigen Fachzeitschrift über ein wichtiges buddhistisches Kloster in Korea. All das steigerte mein Interesse an der Vorstellung dieser beiden „schreibenden Frauen“.

[각주 (Footnotes)]

¹ Vgl. Teil A in StuDeO-INFO Dez. 2025, S. 6ff.

² Vgl. hierzu: Schleswig-Holsteinisches Biographisches Lexikon. Hrsg. Von Olaf Klose, Bd. 3 1974, S. 43-44.

(페이지 4/5)

Jedoch waren – im Unterschied zur gut dokumentierten Familiengeschichte des Ehepaares Mayr – nicht einmal die Lebensdaten von Bertha Gottsche bzw. ein offizielles Foto des Hamburger Professors Carl Gottsche in einschlägigen Medien zu finden. Das in dieser Publikation veröffentlichte Foto von Carl Gottsche stammt aus dem Besitz der Staats- und Universitätsbibliothek Hamburg und wird mit freundlicher Genehmigung der Institution erstmals in diesem Rahmen abgedruckt.⁴

Da das Ehepaar Gottsche wohl kinderlos blieb und die einzige Schwester des Geologen, Wilhelmine Gottsche, unverheiratet, wie die für diesen Artikel ermittelte Todesanzeige für Carl Gottsche vom 11. Oktober 1909 belegt, existiert leider nach heutigem Kenntnisstand kein Familien-Nachlass. Die wenigen Dokumente etc. zu Bertha Gottsche sind auf mehrere Bibliotheken, Archive verteilt. Um diesen vergleichenden Artikel zu schreiben und Bertha Gottsche als Persönlichkeit wieder „Konturen zu geben“, musste die Verfasserin somit in verschiedenen Archiven recherchieren. Ein Exlibris, einige schriftliche Zeugnisse – aber kein Foto – bleiben vom Leben dieser ungewöhnlichen Frau. Bei den Recherchen ergaben sich weitere interessante Gemeinsamkeiten wie auch Unterschiede, die diese beiden „Professoren-Gattinnen“auszeichnen.

Der Geologe Gottsche hatte bereits 1881 einen Auftrag der japanischen Regierung angenommen und lehrte von 1882 bis 1883 an der Daigaku-Universität in Tokyo Geologie, Mineralogie und Paläontologie. Er war ein rhetorisch begabter Hochschullehrer, der seinen Studenten den Lehrstoff lebendig zu schildern vermochte und gern auch Vorträge hielt. Außerdem richtete Gottsche an der Universität ein Mineralogisch-Geologisches Institut ein.

Seine Frau unterstützte wie Irene Mayr die Projekte ihres Ehemanns. Gemeinsam bestieg das Ehepaar Gottsche 1883 den Berg Fuji. Danach reisten sie weiter nach Korea. Dort führte Prof. Gottsche von Mai bis Dezember 1884, erstmals in Korea überhaupt, moderne westliche geologische Untersuchungen in diesem zu dieser Zeit noch unerschlossenen Land durch. So stammt die 1886 veröffentlichte erste moderne Abhandlung unter dem Titel „Geologische Skizze von Korea“ (1886) aus der Feder des deutschen Geologen Carl Christian Gottsche.

Die Reisebedingungen der Ehepaare Gottsche und Mayr dürften also gleichermaßen herausfordernd gewesen sein. Die Landkarte mit der Reiseroute des Ehepaares Gottsche durch das damals völlig unerschlossene Korea ist erhalten geblieben und wurde mir von Herrn Prof. E. Dege als kollegiale Geste zur Verfügung gestellt. Auf dieser Karte ist das Dorf Nakdong in der Nähe von Sangju eingezeichnet, obwohl sich dort keinerlei geologisch interessanten Objekte befinden. Das lässt die begründete Annahme zu, dass das Ehepaar in Nakdong auf dem Anwesen der renommierten Adels-Familie Yu – dem Suam-Haus im Dorf Nakdong in der Nähe von Sangju – auf dieser be-

[각주 (Footnotes)]

³ Quelle: https://www.flickr.com/photos/ngu-no/

⁴ Vgl. Staats und Universitätsbibliothek Hamburg, Carl Gottsche (1855-1909), https://resolver.sub.uni-hamburg.de/kitodo/HAN-Sif2056 (Digitalisat)

Pfad: Nachlass Werner von Melle / Sammlungen / Fotos / Portraitfotos Dritter (Signatur: NvM : Portr. : 52).

Ich danke Frau Diekert und Herrn Dr. Amtstätter für die freundliche Unterstützung und unbürokratische Bereitstellung des Fotos.

Vgl.https://img.sub.uni-hamburg.de/kitodo/PPN689065248_19091013/ PDF/00000012.pdf

(Todesanzeige Carl Gottsche, in: Hamburgischer Correspondent, Morgenblatt, Hamburg, 11. Oktober 1909, S. 6)

Die Verfasserin dankt an dieser Stelle Frau Kathrin Drechsel, wissenschaftliche Bibliothekarin an der Universitätsbibliothek Erfurt, für die fachliche Unterstützung bei den umfassenden Recherchearbeiten zum Ehepaar Gottsche.

Vgl. hierzu: Sylvia Bräsel: Geologen und Geographen als wichtige Multiplikatoren der Beziehungsgeschichte: Prof. Dr. Carl Christian Gottsche (1855-1909), Carl Friedrich Theodor von Waeber (1841-1910), Dr. Siegfried Genthe (1870-1904), Prof. Dr. Hermann Lautensach (1886-1971) & Prof. Dr. Eckart Dege (*1942) In: Kultur Korea, H.2/ 2013

Der Adelssitz Suam-Haus in Nakdong in der Nähe von Sangju in der südkoreanischen Provinz Nord-Gyeongsang, geht auf den zweiten Sohn des bekannten neokonfuzianischen Philosophen Yu Seong-ryong – auch Yu Seongnyon und Ryu Seongryong transkribiert (1542-1607) – zurück. Yu Seong-ryong war während der Hideyoshi Invasion (Imjin-Krieg) 1592-1598 Premierminister von Korea und ernannte in dieser Position seinen Jugendfreund Yi Sun Sin (1545-1598) zum Admiral. Yi war ein bedeutender koreanischer Admiral 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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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werlichen Forschungsreise einmal einen Aufenthaltsort zum Kräftesammeln und eine solide Übernachtungsmöglichkeit fand.

Für die Übermittlung dieser Tatsache bin ich dem bekannten Korea-Geographen Prof. E. Dege – in Abstimmung mit dem südkoreanischen Geographen Prof. Yu Woo-ik (der aus dieser Yangban-Dynastie in Nakdong stammt) – zu Dank verpflichtet.

Auslöser für diese Erkundungsreise von Gottsche war wohl der Umstand, dass die herrschende Joseon-Dynastie (1392-1910) in Korea in dieser Zeit die wirtschaftlichen Verhältnisse zu verbessern suchte. Aus diesem Grunde hatte man den Ostasien-Fachmann und Diplomaten 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7-1901) als Berater eingeladen. Er erkannte die Bedeutung der Bergbauexploration für die wirtschaftliche Entwicklung und lud daraufhin Prof. Gottsche aus Tokyo ein, um eine entsprechende geologische Untersuchung der koreanischen Halbinsel durchzuführen. Dabei lernte das Ehepaar Gottsche in kurzer Zeit viel über „Land und Leute in Korea“. Unter diesem Titel publizierte Carl Gottsche ebenfalls 1886 einen Artikel in der „Gesellschaft für Erdkunde“ (Heft 5, S. 1-21).

Wie das Ehepaar Mayr waren auch Carl Gottsche und Frau zu ihrer Lebenszeit gesellschaftlich anerkannt und gut (international) vernetzt. So fand sich u.a. ein Brief von Bertha Gottsche vom 20.10.1933 im Nachlass des bekannten Hamburger Senators, Juristen und Bürgermeisters Werner von Melle (1853-1937), der als Förderer von Bildung und Wissenschaft in der Hansestadt noch heute gewürdigt wird. Der dänische Geologie-Professor Victor Madsen (1865-1947), der 1896/97 in München studierte, stand mit dem Ehepaar ebenfalls in Kontakt. Die guten Beziehungen zu Fachkollegen in Dänemark und auch Norwegen schon zu Studienzeiten von Carl Gottsche belegt ein Netzfund der Verfasserin.

Auch nach dem Ableben von Carl Gottsche pflegte seine Witwe die vielfältigen Kontakte weiter. So berichtet „Auburn Daily Journal“ noch im Jahre 1916, dass Frau Gottsche an der „Brautparty“ eines renommierten deutsch-amerikanischen Paares in Sacramento teilgenommen habe. So schließt sich ein weiterer Kreis, der zur Einordnung der Reisen der beiden Frauen beiträgt.

Doch nicht nur das Naturell der jungen Frauen wie die beschwerlichen Reisebedingungen der beiden Ehepaare lassen Parallelen zu. Die Lebensgeschichten spiegeln sich auch in der Tragik des frühen Ablebens von Heinrich Mayr und Carl Gottsche. Irene Mayr wie Bertha Gottsche verloren früh ihre Ehemänner, die sich rastlos für ihre Forschungen engagiert hatten. Carl Gottsche verstarb nach einem Schlaganfall bei einer Exkursion auf die Insel Helgoland mit 53 Jahren 1909. Der 1854 geborene Heinrich Mayr erlag den Folgen eines Schlaganfalls während einer Lehrveranstaltung im Jahre 1911.

[각주 (Footnotes)]

noch heute international bekannter Militärstratege des 16. Jahrhunderts. Er führte maßgeblich die koreanischen Seestreitkräfte während des Imjin-Kriegs und trug entscheidend zur Abwehr der Invasion der Japaner bei. Bereits im Jahre 1591 begann er während der japanischen Invasion unter Toyotomi Hideyoshi (1537-1598) mit der Entwicklung der sogenannten „Schildkrötenboote“, die durch ihre starke Bewaffnung die zahlenmäßig überlegenen Japaner zurückschlagen konnten.

Ich danke Herrn Prof. E. Dege für die kollegiale Übermittlung dieser Fakten und Zusammenhänge.

Vgl.: Shower for Bride Elect. In: Auburn Daily Journal, Volume IV, Number 29, 14 February 1916, Page 4, Advertisements Colum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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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tha Gottsche – eine Frau macht den heutigen koreanischen Nationalschatz Nummer 24 in Europa bekannt

Bertha Gottsche muss für ihre Zeit eine ungewöhnlich selbständige, selbstbewusste und gebildete bürgerliche Frau gewesen sein. So konnte die Verfasserin dieses Beitrages ermitteln, dass Bertha Gottsche – ohne damals gängigen männlichen Begleitschutz – im Herbst 1913 als Witwe nochmals nach Ostasien reiste und sogar eine zweite Studienreise nach Korea nach dem Ersten Weltkrieg anstrebte. Das belegt der Entwurf eines Schreibens auf Staatssekretär-Ebene vom 12.8.1920, der im Geheimen Staatsarchiv Preußischer Kulturbesitz verwahrt wird.10

Das macht deutlich, dass auch eine vereinfachte Vorstellung von „intellektuell unterdrückter Weiblichkeit“ in dieser Epoche einer gewissen Differenzierung bedarf. Voraussetzung für das Reisen war aber auf jeden Fall eine entsprechende finanzielle Ausstattung, die Unabhängigkeit garantierte. Bertha Gottsche gibt zum Beispiel in ihrem Artikel selbst zu Protokoll, dass sie in Begleitung ihres „Dieners und eines koreanischen Dolmetschers“ reiste, „der sein fertiges Deutsch in der Schule von Herrn Bolljahn¹¹ in Seoul gelernt hatte“(ebenda, S. 167).

Verzögert durch den Ersten Weltkrieg erschien 1918/19 in der renommierten „Ostasiatischen Zeitschrift“¹² ein wissenschaftlicher Artikel von Bertha Gottsche unter dem Titel das „Steinhöhlen-Kloster Sok-Kul-Am“ (heute als Seokguram-Grotte / 석굴암 bezeichnet). Die mit Fotos und einer Skizze (Abb. 4) unterlegten Ausführungen von Bertha Gottsche, dokumentieren eine fundierte Auseinandersetzung mit der buddhistischen Kultur des ersten koreanischen Reiches, der Silla-Dynastie (57 v. Chr. bis 935 n. Chr.) Das wiederum beförderte das Interesse besonders westlicher Fachleute an dieser bereits in der Frühphase der Silla-Dynastie von 742-780 erbauten buddhistischen Anlage. Hier ist anzumerken, dass in der Endphase der konfuzianisch geprägten Joseon-Dynastie (1392-1910) diese Kulturgüter in Vergessenheit geraten waren. Es ist interessant, dass der Mitherausgeber des Fachjournals, Prof. William Cohn (1880-1961), ohne Dünkel in seinem nachfolgenden Beitrag „Zur koreanischen Kunst“ (ebenda, S. 168-200) die Arbeit der Frau Bertha Gottsche positiv hervorhebt. Cohn schloss sogar in der „Ostasiatischen Zeitschrift“ im Jahre 1922 weitere Ausführungen zur Thematik an,¹³ die Bertha Gottsche letztlich auf eine Stufe mit anerkannten männlichen Wissenschaftlern stellen.

Bertha Gottsche muss auch mit 56 Jahren noch über eine robuste Gesundheit verfügt haben. Sonst ist es schwer vorstellbar, dass sie den damals von Pflanzen überwucherten steinigen Pfad zur Seokguram-Grotte von etwa 3-4 Kilometern (vgl. Abb. 3, Foto von B. Gottsche) auf dem Berg Toham (ca. 750 Meter über dem Meeresspiegel mit Blickrichtung auf das koreanische Ostmeer) in der damals gängigen Kleidung für gutsituierte bürgerliche Damen bewältigen konnte. Denn das sich im „Dornröschenschlaf“ befindliche Seokguram wurde erst 1909 durch Zufall von einem Postboten, der vom Wege abgekommen war, wiederentdeckt. Die japanische Kolonialbehörde sicherte zwar in den Folgejahren das Bauwerk, jedoch mit wenig Kunstverstand. So wurde die Rotunde mit Beton saniert, was zu gravierenden Schäden an der aus weißen Granitblöcken geschaffenen künstlichen Grotte und den Statuen führte. Erst unter dem südkoreanischen „Modernisierungs-Diktator“ Park Chung-hee (1917-1979) wurde von 1961-1966 eine fachgerechte Restaurierung vorgenommen. Bereits 1962 erklärte man die Tempelanlage zum Nationalschatz Nummer 24.

Als ich 1995 erstmals den Grottentempel Seokguram und das ca. zwei Kilometer bergab gelegene Bulguksa-Kloster besuchte, hatte die UNESCO gerade die Gesamtanlage in die Welterbeliste aufgenommen. Zu dieser Entwicklung hat die Publika-

10Vgl. Geheimes Staatsarchiv Preußischer Kulturbesitz, GStA PK, VI. HA, Nl Becker, C.H., Nr. 466 (unfoliert). Ich danke Herrn Andreas Kutter für die freundliche Bereitstellung des o.g. Schreibens vom 12.8.1920.

¹¹ Vgl. hierzu: Sylvia Bräsel: Johann Bolljahn (1862-1928): Begründer des Deutschunterrichts in Korea – zur interkulturellen Karriere eines pommerschen Lehrers in Ostasien. – In: Baltische Studien. Pommersche Jahrbücher für Landesgeschichte, Kiel 2010.

12 Ostasiatische Zeitschrift Vol. 7 (1918-19), S. 161-167.

13Ostasiatische Zeitschrift Vol. 9 (1920-22), S. 306-309).

Vgl.https://archive.org/details/ostasiatischezeitschrift-9.-jg.-1920-22/page/308/ mode/2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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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on von Bertha Gottsche einen kleinen Anstoß gegeben.

Wie groß das Echo bereits kurz nach der Wiederentdeckung in Korea war, belegt ein Auszug aus einem Artikel mit dem Titel „Wunder der Welt“, der am 2.6.1923 in der Zeitung „Dong-A Ilbo“veröffentlicht wurde. „Die buddhistischen Statuen der Seokguram-Grotte… zählen zu den ältesten und größten Kunstwerken des Ostens. … Sie sind vollständig aus Granit gefertigt und ihre einzigartige Schönheit ist für unser koreanisches Volk wahrlich eine Quelle des Stolzes“, ist hier nachzulesen. Diese Aussage verweist auf die identitätsstiftende Wirkung dieses Kunstwerkes für Korea in der Zeit der japanischen Kolonialherrschaft.

Die zentrale Buddha-Statue (Abb. 6) misst ohne Sockel 3,5 Meter und gehört zu den größten freistehenden Buddhastatuen des alten Korea. Interessant ist zudem die Tatsache, dass diese Statue genau in Richtung des Unterwassergrabes des legendären König Munmu (626-681) blickt. Munmu (문무) war der erste Herrscher des Vereinigten Silla-Reiches. Er ließ sich im koreanischen Ostmeer (Japanisches Meer) begraben. Die Legende besagt, um so noch im Tode die ständigen Invasionen aus Japan, symbolisch „abzuwehren“. So schließen sich Kreise zwischen Vergangenheit und jüngster Geschichte.

Was bleibt

Irene Mayr und Bertha Gottsche stehen stellvertretend für eine Reihe bürgerlicher Frauen ihrer Zeit, die über Bildung, Wissen und Engagement selbst aktiv waren und ihre Ehemänner partnerschaftlich unterstützten. Bertha Gottsche war es auf der Grundlage ihrer finanziellen Unabhängigkeit als Witwe sogar möglich, ein selbstbestimmtes Leben (auf Reisen) zu führen und ihren wissenschaftlichen Interessen nachzugehen.

In der Philosophie von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nimmt der Gedanke, dass der Mensch ein Produkt seiner Zeit ist, eine zentrale Stellung ein. Das umfasst historische, soziale wie ideengeschichtliche Zusammenhänge und sollte aus meiner Sicht bei der Aufarbeitung von Selbstzeugnissen und anderen Wortmeldungen von Frauen stärker in dieser Differenziertheit einbezogen werden. Denn letztlich sind erst auf dieser Basis seriöse Einordnungen und komplexe Wertungen möglich, die solche Reiseberichte, Briefe und Artikel nicht pauschal als Imagination kolonialer Bestrebungen oder gar exotischer Sehnsüchte vereinfachen.

Irene Mayrs umfangreicher Reisebericht ist ein frühes Zeitdokument über die Insel Hokkaido und das Leben der Ainu um 1890 aus dem Blickwinkel einer Frau. Das Engagement von Bertha Gottsche für buddhistische Kulturgüter in Korea und ihre Publikation haben maßgeblich zur internationalen Bekanntmachung des heutigen „Nationalschatzes Nr. 24“ in Korea beigetragen. Die Aufzeichnungen von Irene Mayr und Bertha Gottsche verlangen Hochachtung ab – und stehen letztlich für Wortmeldungen von Frauen, die ihren Horizont im Rahmen der gegebenen sozialen und gesellschaftlichen Normen effektiv erweiterten.

Doch lassen wir einer der bedeutendsten Frauen dieser Zeit, der Nobelpreisträgerin Marie Curie (1867-1934), das letzte Wort: „Ich habe gelernt, dass der Weg des Fortschritts weder kurz noch unbeschwerlich 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