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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안항(古代島安港)과 “Gan-keang”의 상관관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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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안항(古代島安港)과 “Gan-keang”의 상관관계연구

 -“원산도 개갱 정박설”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오현기(대구동일교회 목사, Dr. theol.)

 

             

                                       《목차》

           

I. 들어가는 말

 

      II. 로드 애머스트호의 정박지, “고대도안항 (古代島 安港)”

 

1.   고대도 안항”의 존재여부

2.   고대도 안항”: 선참(船站)과 세선(稅船)의 점검소(點檢所)

3.   고대도 안항” 정박 여부

4.   고대도 안항” 정박 기간

5.   고대도의 문정관”이란 표현

 

III. “Gan-keang”이란 표기문제

1. “Gan-keang”은 “a safe anchorage (안전한 항구)”이다.

2. “Gan-keang”은 “고대도 안항”이다.

3. “Gan-keang”은 “Majoribanks Harbour”이다.

 

IV.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본 고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1]가 탑승했던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의 “고대도 안항”(古代島安港)”[2] 정박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로드 애머스트호의 “원산도 개갱 정박설”을 비판하고자 한다.[3] 필자는 그간 발굴된 국내외 문헌사료와 국내외 해도사료를 중심으로 상호 비교하거나, 종합적인 분석을 통해 지속적으로 로드 애머스트호의 “고대도 안항”정박을 주장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본 고에서는 Gan-keang과 관련하여 새롭게 발굴된 사료와 그간의 발전된 연구의 성과를 반영하고자 한다.

일각에서 “원산도 개갱 정박설”을 주장하며, 귀츨라프 선교사의 한국 선교의 본격적 사역지이며, 본격적인 조선과 서양문화화 간의 교류의 무대가 되었던 고대도를 부인하는 주장이 나와 이를 바로 잡을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는 원산도 정박설의 오해와 혼란을 바로 잡아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하고자 한다.

“원산도 개갱 정박설”은 주장은 로드 애머스트호가 정박한 항구, “Gan-keang”이라는 표기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로드 애머스트호에 탔던 칼 귀츨라프와 로드 애머스트호의 항해책임자이자 동인도회사 상무관 린지(Hugh Hamilton Lindsay, 1802-1881)가 “Gan-keang”이라고 기록했던 것을 “원산도 개갱 정박”을 원산도 개갱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자의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고는 Gan-keang 대한 표기와 의미를 정확히 고찰함으로써, Gan-keang이 어떤 항구를 지칭한 것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고대도 안항”이 “Gan-keang”임을 논증을 하고자 한다. 또한 “고대도 안항”이 한국 최초의 정식 통상 요구선이었던 로드 애머스트호가 조선에 최장기간 정박한 항구일 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본격적 선교가 이루어진 복음 전래지임을 명확히 하고, 본격적 문화 교류를 시도했던 그 역사적,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자 한다.

  1.  로드 애머스트호의 정박지, “고대도 안항 (古代島 安港)”
  2. 고대도 안항”의 존재여부   

“고대도 안항”이란 이름은 『순조신록』, 순조 32년 7월 21일 자의 자문(咨文: 조선시대 중국과의 공식적 외교문서)에 “본 년 6월 26일(양력 7. 23) 유시(酉時)(오후 5-7시) 경에 이양선(異樣船) 1척이 본주(本州) 고대도 (古代島)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라고 나타난다. 그리고 『일성록』 순조 32년 7월 11월과 14일의 각 각의 기록에서 “고대도 안항”에 끌어와 정박했다(古代島安港引泊)”라고 한다. 이를 참고할 때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 지명이 아니고 지어낸 이름”이라거나, “지어낸 가상의 지명”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순조신록』에 언급된 “자문”의 경우, “괴원(槐院, 승문원)으로 하여금 사실(事實)을 매거(枚擧: 하나 하나를 들어서 말함)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였음으로 (撰出咨文),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다”라는 말에도 드러나듯이,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한 외교문서임을 알 수 있다.[4] 특히 『순조실록』 순조 32년 7월 21일 자에 나타나는 “자문(咨文)”이란 조선시대, 중국과 왕복하던 외교문서의 하나임을 고려하고, 조선과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감안해 본다면, 의도적으로 사실에 입각하지도 않은 거짓 문서를 허위로 작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외국 선박이 다녀간 것을 대국(중국)에 보고하지 않았다가 중국이 알고 책망하면 곤란하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문을 찬출(撰出-시가나 문장을 지어내는 것)하여 보내자“고 한 것에 비롯되었다”[5]고 하며 자문에 무엇을 꾸며낸 내용을 넣은 것으로 이해하지만, 여기서 “찬출자문(撰出咨文)”이란 ‘외교문서를 작성한다’라는 공식문서에 자주 보이는 관용적 표현이다.[6] 실제로 이 자문을 작성하여 청(淸)나라 예부에 송부하였다. 이렇게 보내진 자문을 통해 선종성황제실록(宣宗成皇帝實錄)에 고대도의 존재가 이 자문에 근거하여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청나라의 황제가 순조대왕에게 이 일로 말미암아 하사품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7]. 이 사실을 기록한 조선의 기록인 『통문관지(通文舘志)』 卷11, 紀年續編, 純宗 32年 壬辰 31쪽에도, 조선의 조정이 자문을 통하여 낱낱이 보고한 일에 대해 뒷날 청의 황제로부터 ‘법도(法度)를 잘 지켰고 대의(大義)를 길이 밝혔다고 칭찬을 받고 물품을 하사 받았다(賞賜)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청나라의 왕조실록까지 고대도가 언급되고 있다. 특히 “안항”은 『조선왕조신록』 전체를 통틀어 고유명사인 지명으로 만 나타나는데, 이 곳이 바로 고대도에 있는 항구, 안항이다.

  1. 고대도 안항”: 선참(船站)과 세선(稅船)의 점검소(點檢所)

일각에서는 “원산도는 110년간 조운선을 점검하는 기지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고대도가 조운선 점검기지라는 주장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8] 그 주장의 요지는 고대도가 선참과 점검소가 없음으로 고대도에 외국배가 장기 정박할 이유가 없는 중요하지 않은 항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도의 안항은 예로부터 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항구이다. 조선시대 지도에 나타나는 해로는 통해 귀츨라프 일행의 고대도 정박을 정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당시 해로에 따르면, 그들의 고대도 정박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조선 지도들의 해도들을 참고해 볼 때 애머스트호가 녹도와 불모도를 거친 후 비교적 현지 지리에 밝은 조선 항해사들을 태우고 “동북쪽”으로 향했다.[9] 그렇다면 당시 세곡선의 배 길을 그린 공식해로는 남쪽에서 올라와 고대도 근처를 반드시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대도(古代島)에는 참(站)또는 선참(船站)이 설치되어 세선(稅船)의 점검소(點檢所)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10]

조선 시대 지방 관아의 등록류 문서들을 편찬한 사료집인 『각사등록(各司謄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대도(古代島)에는 참(站) 또는 선참(船站)이 설치되어 이미 세선(稅船)의 점검소(點檢所)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각사등록(各司謄錄)』, 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 순조(純祖) 23년(1823)의 기록에 보면, “홍주(洪州) 지역 고대도(古代島) 참(站)”[11]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은 순조대왕시대에 이미 고대도에 참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비록 순조대왕 이후의 기록이긴 하지만, 고대도에 있는 참(站)은 당연히 선참(船站)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기록이 『각사등록』철종(哲宗) 12년(1861), 5월 초 7일, 충청도 수영(忠淸道水營))에 남아있다.[12] 동시에 이 선참은 세선의 점검소(點檢所)였다.[13] 그리고 이 선참과 세선의 점검소가 있는 곳이 바로 “고대도 안항”이었다.

  1. 고대도 안항” 정박 여부   

조선사료들은 녹도를 거치고 불모도(동소도) 를 거친 로드 애머스트호는 “고대도 안항”에 정박했다는 다수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순조신록(純祖實錄)』에 보면공충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7월 22일(음력 6월 25일)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바다(古代島後洋)에 와서 정박하였다”라고 장계를 올렸다. 또한 자문에는 “본 년 6월 26일(양력 7월 23일) 유시(酉時)(오후 5-7시) 경에 이양선(異樣船) 1척이 본주(本州) 고대도(古代島)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다”고 한다.[14]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 영길리 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에 고대도 전항(前港)[15] 에 인박(引泊)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경선은 1832년에 청나라에 동지사겸 사은사로 다녀온 인물로 로드 애머스트호에 대한 청나라 보고를 염두에 두어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에는 임진년(1832년) 7월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 불모도(不毛島) 뒷바다에 표류해 오자, 고대도(古代島) 앞 항구(前港)에 끌어다 정박시켰고, 이를 두고 공충감사 홍희근은 그의 장계(狀啓)에서 “그 배를 경솔하게 먼저 고대도로 끌어다가 정박시킨 것도 경솔한 짓에 가깝다”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이는 고대도가 정박지였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 일도 경솔한 일이라는데, 원산도 같은 제 3의 장소로 로드 애머스트호를 또 옮긴다는 것은 당시 정황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이 책에는 조선에서의 항로에 관한 귀츨라프 일행의 중요한 진술이 담겨 있는데, 그들은 고대도에 도착하기 전에 장산, 녹도, 동소도를 지나 왔다고 필담으로 진술했다.[16]

『일성록(日省錄)』[17] 에도 영국배가 고대도에 표도(漂到), 소박(所泊), 도박(到泊), 유박(留泊), 인박(引泊) 등의 서로 다른 다양한 표현을 쓰며 귀츨라프가 승선한 로드 애머스트호가 고대도에 정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18]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19] 에는 『비변사등록』, 순조 32년 1832년 7월 8일(음)에는 고대도에 끌어와 정박시킨 배의 사람들과 언어로 소통이 되지 않자 글로 문정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20]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21] 에도 홍주 고대도에 끌어와 정박시킨 것[22]과 고대도에 표류하여 도착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23]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1800년대 초에 저술한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 격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경사편 5, 논사류 1, 논사(論史) 서양 편[24]에도 “순조 32년(1832)에도 외양선(外洋船)이 표류되어 호서(湖西) 홍주(洪州)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했는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의 배라 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외국과의 통교(通交)에 관한 사적 및 의절(儀節)등의 사실을 수록한 책인 『통문관지(通文志)[25] 에도 이양선 한 척이 고대도에 들어와 정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심지어 청나라 실록인 『선종성황제실록(宣宗成皇帝實錄)』에도 고대도 앞바다에 사입(駛入)[26] 이라 기록하여 영국상선이 고대도 앞 바다에 들어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상기 언급된 모든 조선사료에서도 보듯이 녹도를 떠난 뒤 불모도(동소도)를 거쳐 정박한 곳은 고대도이며, 이 곳에서 장기간 정박하여 체류하다 남하하였다. 로드 애머스트호의 고대도 정박 이후의 충청연안의 다른 섬의 정박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1. 고대도 안항” 정박 기간

고대도의 정박기간과 관련해서『일성록』 순조 32년 8월 7일의 기록에는 공충수우후(公忠水虞候) 김영수의 대응이 나오고 있는데, 김영수가 원산도에 머물고 있었던 때, 7월 22일 (음력 6월 25일) 녹도(鹿島)에 있는 별장(別將)의 치보(馳報)에 이양선 한 척이 불모도 외양(不毛島外洋)에 정박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배로 바다로 나갔지만, 곧 큰 비바람이 일어나(風雨大作) 이틀 동안 바람과 비에 막혀 이틀간 지체되어 고대도로 표류하여 도착한 것은 7월 25일(음력 6월 28일)이었다 한다. 노를 저어 전진하여 그 배(로드 애머스트호)의 정박장소까지 갔을 때에는 그 배는 돛을 올리고 내양(內洋)을 향하여 닻을 내린 상태로 있었다 한다.[27] 이 기록에도 7월 25일 (음력 6월 28일)에는 이미 고대도에 로드 애머스트호가 도착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같은 날 『일성록』의 기록에는 홍주목사 이민회가 7월 23일 밤(음력 6월 26일) 밤에 받아 읽은 수군우후 김영수의 감결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양선이 불모도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배를 타고 7월 25일(음력 6월 28일)에 고대도에 겨우 도착했지만, 이양선은 고대도에 이미 배를 정박하고 있었다고 한다.[28] 이 기록들은 로드 애머스트호가 적어도 7월 23일 (음력 6월 26일)에는 불모도에 도착해 있었고, 7월 25일(음력 6월 28일)에는 이미 고대도에 정박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문정관인 역관 오계순(吳繼淳)의 고대도 정박 기간을 보고할 때, “문정역관 (오계순)이 8월 4일 (음력 7월 9일) 한양에서 출발하여, 8월 8일(음력 7월 13일) 오후 5시경에 “고대도 표류인(古代島漂人)”의 선박이 있는 곳에 겨우 도착하여, 8월 9일 (음력 7월 14일) 수군우후와 홍주 목사와 함께 필담으로 문정하였다”고 한다.[29] 이 또한 로드 애머스트호가 적어도 8월 9일 (음력 7월 14일)까지는 고대도에 머물러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비교 할 수 있는 고대도 도착에 대한 서양 사료는 귀츨라프와 린지의 글인데, 7월 25일에 정오를 조금 지나 정박했던 불모도 앞바다를 떠나 고대도에 당일 도착 했음을 알리고 있다.[30]실재로 귀츨라프 일행은 자신들의 정박지를 언급할 때, 녹도와 고대도 사이에 동소도(불모도)를 언급하고 있다. 동소도가 곧 불모도이다(東小島卽不毛島).[31]

귀츨라프는 7월 24일 조선 고관이 보낸 등노(Teng-no)[32]을 포함한 사람들이 큰 배를 타고 그들이 정박해 있는 곳을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등노는 애머스트호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33] 귀츨라프 일행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7월 25일(음력 6월 28일) 그들이 머문 임시 정박지로부터 조선인들이 제안한 안전한 항구로 출발해 7마일 거리에 있는 섬들을 잇달아 통과 했다. “Gan-keang”에 도착하여 방문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들이 과거 정박했던 섬이 녹도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34] “Gan-keang”이라고 불리는 곳은 조선인들로부터 “a safe anchorage”[35], 또는 “ein sicherter Ankerplatz”[36]로 소개 받은 곳이다. 즉 “안전한 항구”, 안항(安港)이다. 린지도 7월 25일 위험한 정박지(불모도)를 출발해 당일에 소개 받은 목적지, “Gan-keang”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37]

7월 25일 (음력 6월 28일)에 고대도에 도착했다는 것과 시기가 다른 자료도 존재한다. 고대도 뒷바다 나타난 것이 7월 22일(음력 6월 25일) 고대도 정박을 7월 23일 (음력 6월 26일) 유시 (酉時, 오후 5~7시)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38] 그러나 서양 사료와 다른 조선 사료를 종합할 때 7월 25일이 더 타당하다.

애머스트호의 여정에 관해 자료들 사이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부분부터 종합하여 추측해보면, 그들은 제일 먼저 외연도 근처에 도착(7월 21일)했고, 녹도 정박(7월 21~23일)을 거쳐 불모도(7월23~25일 정오)에 머물러 있었고, 그리고 현지 조선인들의 권유에 따라 고대도에 (7월 25일 오후)에 도착하였다. 등노를 태운 배가 7월 24일에 왔다면, 귀츨라프 일행이 불모도에 정박했을 때가 맞을 것이다. 외연도, 녹도, 불모도의 순서로[39] 애머스트호가 자의로 탐사했다. 불모도에서 고대도까지는 조선 항해사들이 탑승하여-비록 고대도 까지 뱃길을 아는 사람은 한 명 뿐 이었지만- “Gan-keang”으로 바닷길을 이끌었다.[40]

[1] 칼 귀츨라프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사역에 대하여는 오현기,『굿모닝 귀츨라프』, (성남: 북코리아, 2014)를 참조하라.

[2]고대도는 조선 측 공식문서들 외에 조선지도들인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대동총도(大東摠圖)>와 『여지도(輿地圖)』, 『광여도』에는 高代島로, 『비변사방안지도』의 호서지도편 <호서전도>에서는 高臺島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는 고태도(古台島), 『1872년 지방지도』 충청도편 <보령부지도>와 『동국여도(東國輿圖)』의 <삼남해방도>에서 古代島로, 서로 다르게 기록됐지만, 이는 모두 고대도(古代島)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해도사료를 참고하면,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대동총도(大東摠圖); 1750년 초 제작)에는 고대도 곁을 지나는 세곡선의 해로가 정확히 그려져 있다. 또 동국여도(東國輿圖: 1800년-1820제작)에도 세곡선의 항로를 더 자세히 보여 주고 있는데, 원산도(元山島)나 삽시도(揷矢島)를 통해 오는 배가 고대도 앞에서 만나고 하나로 합해져 고대도와 장고도 사이를 오가는 뱃길이 있다. 이 지도는 고대도가 해상 교통에 중요한 섬인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동국여도(東國輿圖), 삼남해방도(三南海防圖) (1800년-1822년 제작),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 janggak.snu.ac.kr/)).

1600년대 초반부터 남부 지방의 조곡미를 운반하던 조운선의 중간 기착지였고, 남해안 지방에서 연평도로 조기잡이 가던 선박의 물품 보급과 보충을 위한 기항지로서 상설시장인 파시(波市)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또한 원양어선(중선)의 기지로 해산물 거래가 많았고, 중국 배가 드나들 정도로 발전된 곳이었다. 고대도는 상업도 아울러 발달했다. 뱃사람들과 어상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소를 갖추고 있었고, 또한 잡화상,  어구 상, 음식업, 접객업등이 발달했던 곳이다.(전영진,  “고대도 민속의 특징”, 한국국어교육학회 편, 「새 국어 교육」, Vol. 52 (1996), 335.) 그래서 1759년의 인근 도서의 주민 현황을 보면, 고대도에 상대적으로 많은 주민이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엮은 여지도서(輿地 圖書)의 1759년도를 기준으로 하면 고대도의 가구 수가 면적이 더 넓은 삽시도와 장고도의 가구 수를 합친 만큼이나 많았다. (전영진, “고대도 민속의 특징”, 337).

[3] 대표적인 주장은 신호철,『귀츨라프행전』, (서울: 양화진선교회, 2009)이다.

[4] “令槐院, 枚擧事實, 撰出咨文, 從便入送于 禮部” 『조선왕조실록』, 순조 32년(1832) 7월 21일.

[5] 신호철, “귀츨라프 선교지 원산도에 관한 연구”,  http://www.yanghwajin.co.kr/zboard/view.php?id=foru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49.

[6] “찬출자문(撰出咨文)”란 표현은 일성록에만 해도 178건 나오는 외교문서를 작성한다는 관용적 표현이다.

[7] 하사품 항목은 다음과 같다. 망단(蟒緞), 섬단(閃緞),비단(錦緞) 2 필,소단(素緞) 4 필, 수자단(壽字緞) 24 필을 하사했다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선종성황제실록』(宣宗成皇帝實錄), 卷之二百二十二 道光十二年 閏九月 二十九日,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586926&remap=gb.

[8] 신호철,  “귀츨라프의 7월 25일 고대도와 원산도 정박론 비교”

http://www.yanghwajin.co.kr/zboard/view.php?id=foru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49.

[9] H. Lindsay, Report of Proceedings on a Voyage to the northern Ports of China, in the Ship Lord Amherst, 2. ed., (London: Fellowes, 1834), 224.

[10] 고동환, 『한국전근대교통사』,(들녘: 서울, 2015), 184을 참고하라. 조운선단의 항로에 고대도가 언급되고 있다.

[11] 『각사등록(各司謄錄)』, 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 순조(純祖) 23년(1823), 9월 17일,충청도 병영(忠淸道兵營),(http://db.itkc.or.kr).

[12] 『각사등록(各司謄錄)』, 충청수영계록(忠淸水營啓錄), 철종(哲宗) 12년(1861), 5월 초7일, 충청도 수영(忠淸道水營),(http://db.itkc.or.kr).

[13] 『각사등록(各司謄錄)』, 충청수영계록(忠淸水營啓錄), 고종(高宗) 2년(1865), 4월 27일, 충청도 수영(忠淸道水營), (http://db.itkc.or.kr).

[14] 『조선왕조실록』, 순조 32년(1832) 7월 21일.

[15] “古代島 前港“, 김경선(金景善), 연원직지(燕轅直指), 제1권 출강록(出疆錄)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순조 32년 11월 25일

[16]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 제1권,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25일.

동소도(東小島)는 동쪽의 작은 섬이란 뜻으로 실재 불모도(不毛島)를 뜻한다. “東小島卽不毛島” (『일성록』, 순조 32년 7월 14일)

[17] 『일성록』 은 1760년 (영조 36) 1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 151년간의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로, 이 책은 1783년(정조 7)부터 국왕의 개인 일기에서 규장각 관원들이 시정(施政)에 관한 내용을 작성한 후에 왕의 재가를 받은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되었다.

[18]『일성록』, 순조 32년 7월 6일; 순조 32년 7월 8일; 순조 32년 7월 9일; 순조 32년 7월 11일; 순조 32년 7월 12일; 순조 32년 7월 14일; 순조 32년 7월 16일; 순조 32년 7월 18일; 순조 32년 7월 18일; 순조 32년 7월 20일; 순조 32년 7월 21일; 순조 32년 7월 21일; 순조 32년 8월 7일; 순조 32년 8월 11일; 순조 32년 8월 13일; 순조 32년 8월 23일; 순조 32년 11월 30일.

[19]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은 조선 중 • 후기 국방과 재정 문제를 중심으로 국정 전반을 논의하던 합좌기구(合坐機構) 비변사의 회의 내용과 관련 기록을 모은 등록이다.

[20] 『비변사등록』에는 영국배가 고대도에 인박(引泊)한 것 (『비변사등록』, 순조 32년 1832년 7월18일)과 이국선이 표도(漂到)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비변사등록』, 순조 32년 1832년 7월21일).

[21]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는 조선시대에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文書)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이다.

[22] 『승정원일기』, (탈초본 115책) 순조 32년 7월 9일 계축 26/33 기사 1832년 道光(淸/宣宗) 12년 “洪州地古代島引泊漂人, 言語難通, 以書問情”; 『승정원일기』 (탈초본 115책) 순조 32년 7월 18일 임술 14/23 기사 1832년 道光(淸/宣宗) 12년에 “洪州地古代島引泊”

[23] 『승정원일기』, (탈초본 115책) 순조 32년 7월 21일 을축 15/18 기사 1832년 道光(淸/宣宗) 12년 에는 “卽見公忠道洪州地古代島漂到異國船問情譯官吳繼淳前後手本”이 있다.

[24]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 후기의 학자인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1800년대 초에 저술한 우리나라 전통 백과사전이다,(http://db.itkc.or.kr).

[25] 『통문관지(通文舘志)』 는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김지남(金指南)이 지었으며, 정조(正祖) 때에 나라에서 간행(刊行)하고, 고종(高宗) 18년(1881)에 다시 중간(重刊)하였다. “異國船一隻來泊於公忠道洪州牧古代島稱以咭唎國人要以西洋布千里鏡等貨和買本國所産物件”(통문관지(通文舘志), 卷11, 기년속편(紀年續編), 純宗 32年 31쪽).

[26] 선종성황제실록(宣宗成皇帝實錄) 卷之二百二十二 道光十二年 閏九月 二十九日 1번째기사 1832년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586926

[27]“金瑩綬則渠時當風和留防於元山島六月二十五日鹿島別將馳報內異樣船一隻漂到於不毛島外洋云故渠乘船出海則風雨大作漂到古代島乃爲風雨所阻兩日留滯二十八日搖櫓前進彼船所泊處則彼船擧帆向內洋下碇故渠乘船隨泊” (『일성록』, 순조 32년 8월 7일).

[28]“帥請議處又啓言洪州牧使李敏會公忠水虞候金瑩綬等原情以爲李敏會則渠於六月二十六日夜得見水虞候甘結有異樣船來泊于不毛島云故乘船馳往二十八日纔到古代島則異樣船先已到泊矣今此引泊云實是未曉而滯留九日與問情官水虞候金瑩綬眼同問情而及聞道啓論罷之報仍爲還邑矣旋聞戴罪擧行之命渠又與京譯官 吳繼淳偕到島中至” (『일성록』, 순조 32년 8월 7일).

[29]“問情譯官手本卑職於本月初九日下直離發十三日酉時僅到古代島漂人所住船近處而十四日與水虞候地方官以書問情” (『일성록』, 순조 32년 7월 18일).

[30] C. Gutzlaff, Journal, 1834, 330; H. Lindsay, Report, 224.

[31] 『일성록』, 순조 32년 7월 14일.

[32] Teng-no는 모리슨의 중국어-영어 사전(Macao: 1819)를 참조할 때 발음이 등노일 가능성이 높다.

[33] K. Gützlaff, Aufenthalt, 249.

[34] H. Lindsay, Report, 224.

[35] C. Gutzlaff, Journal, 329.

[36] K. Gützlaff, Aufenthalt, 249.

[37] C. Gutzlaff, Journal, 330; H. Lindsay, Report, 224.

[38] 『조선왕조실록』, 순조 32년(1832년), 7월 21일

[39] 『일성록』, 1832년 7월 8일(음력).

[40] C. Gutzlaff, Journal,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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